방글라데시에 대한 통찰①,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역사와 독립


안녕하세요. 블로거 라무나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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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 저는 Bangladesh Insight에 대한 시리즈를 만들고 싶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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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글라데시와 인도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니 계속 오셔서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.


방글라데시의 역사

방글라데시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?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도로 높은 인구 밀도, 홍수 및 극심한 빈곤과 같은 자연 재해를 생각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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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실상 사람들은 방글라데시가 이전부터 최근까지 인도보다 1인당 GDP가 높다는 사실을 모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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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히 방글라데시는 인도보다 한국과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파트너로 보인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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국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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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도가 남아시아를 지배하고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도움으로 독립했기 때문에 인도는 스스로를 남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인식하고 이를 잘 알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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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과적으로 GDP는 방글라데시보다 높아야 하므로 이를 포함하는 최근 기사가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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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도가 형이라면 방글라데시는 남동생으로 인식되지만 남동생이 형의 연봉을 넘어서는 만큼 인도는 이제서야 방글라데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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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서 방글라데시에 주목하고 싶어서 이렇게 알아보고자 글을 씁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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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글라데시는 벵골어를 사용하고, 90%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으며, 한국의 1.4배 면적에 1억 6,5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.
많은 인구로 인해 인구 밀도가 매우 높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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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사실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에서 분리되었을 때 동파키스탄이었고 그 후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에 이르러 1971년에 다시 독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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처음에 영국은 동벵골과 서벵골을 분할하려 했으나 서벵골의 힌두 무역상들이 동서벵골로 나뉘면 동벵골 시장을 잃게 되므로 서벵골의 힌두 무역상들은 이에 저항하고 그들이 한 조직은 훗날 간디와 네루가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‘국민회의’와 함께 독립운동단체가 되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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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렇게 분할되지는 않았지만 서 벵골은 여전히 ​​인도의 서 벵골 주로 남아 있고 동 벵골은 “방글라데시”가 되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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쉽게 말해 지도에 보이는 벵갈 지역은 벵골 고유의 문화적 실체와 정체성으로 경작되어 서벵골과 동벵골(방글라데시)로 나뉘어 잘 살고 있지만 파키스탄은 그렇지 않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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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를 들어 파키스탄에서는 “우르두어”가 국어로 사용되지만 인구의 약 7%만이 우르두어를 사용하므로 우르두어, 펀자브어, 신디어, 푸시트어, 영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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즉, 파키스탄의 국어인 우르두어는 인도에서 온 난민들만이 사용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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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서 파키스탄, 벵갈, 방글라데시는 역사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고 종교만 같다고 볼 수 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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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글라데시에서는 대부분의 언어가 벵골어이지만 산악 지역에는 소수의 매우 다른 언어도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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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글라데시의 98%가 벵골어이기 때문에 소수 언어가 많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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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1956년 파키스탄 헌법이 공포되었고 동파키스탄(지금의 방글라데시)은 원래 파키스탄의 일부였으나 1952년부터 벵골어 운동이 시작되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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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파키스탄인들은 대부분 벵골어였지만 파키스탄인들이라 파키스탄의 국어인 우르두어가 중요해 벵골어를 방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.
한국의 세종시처럼 분단되어 다카에 의회를 세울 것이라고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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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후 ‘파티마진나’와 ‘아육칸’이 싸웠고, 지금은 방글라데시 평민당이 ‘파티마진나’를 지지하고 있다.
그러자 아육 칸이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“파티마 진나”의 편을 들었고 상황은 좋지 않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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또한 1965년 인도와 서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일 당시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 돈의 70%를 쓰고 있었는데 다 쓰면 불만이 생길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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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약

인구: 서파키스탄 30% 동파키스탄 70%

지출 금액: 서파키스탄 70% 동파키스탄 30%

수익: 서파키스탄 30% 동파키스탄 70%

중앙 정부 직책: 서파키스탄 85% 동파키스탄 15%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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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든 돈은 동파키스탄에서 벌지만 서파키스탄은 전쟁 때문에 돈만 쓰는 상황이고, ‘벵골어 탄압 정책’이 시행되는 사이 파키스탄에서 타고르의 작품이 금지되는 상황이 발생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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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이클론이 동파키스탄을 강타하여 500,000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국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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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벵골 출신의 인도어 또는 벵골어 말하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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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런 상황에서 1970년 총선이 치러졌고 영연방당은 동파키스탄에서 169석 중 167석을 차지하며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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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파키스탄의 영연방당은 1971년 Datata에서 “이 싸움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.
이 싸움은 독립을 위한 것입니다.
”라는 연설로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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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다가 서파키스탄에서는 ‘학생운동’과 ‘벵골운동’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모두 학살당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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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파키스탄 병사들이 벵갈에서 동파키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고 민간인만 학살하는 대기명령과도 같은 상황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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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히 서파키스탄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동파키스탄에 있을 텐데 그들을 무장단체로 만들어 학살에 가담하게 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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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런 일이 발생하면 수백만 명의 벵골인이 동파키스탄에서 인도의 서벵골 지역으로 대피할 것이며 인도는 이 난민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막후에서 동파키스탄을 지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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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럴 땐 파키스탄에서 “어차피 1차 빵 터뜨리자!
” 1971년에 동파키스탄(방글라데시) 독립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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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렇게 인도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동파키스탄과 인도는 서파키스탄과 대립관계가 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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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의 거리로 인해 서파키스탄은 몇 달 만인 12월 16일에 항복했고 “방글라데시”가 형성되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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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시 미국 항공모함은 이미 벵골만에 있었다.
미국은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것을 막고 있었고 인도를 견제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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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했을 때 인도는 미국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재빨리 미국 편을 들겠다고 말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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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렇게 파키스탄은 친미가 되었고 인도는 소련의 무기를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.
이런 상황에서 동파키스탄이 독립하자 파키스탄 땅의 절반이 사라졌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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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이었고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 척을 끌어 벵갈만에 집어넣었다.


방글라데시는 원래 파키스탄 출신입니다.
그렇기 때문에 리드하는 것이 옳고 편안하지 않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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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되어 독립했기 때문에 당시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은 너무 많은 대규모 소요를 겪었고 이는 인도와 서파키스탄뿐만 아니라 동파키스탄, 즉 벵갈 지역에서도 일어났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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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도의 도움을 받았고 같은 이슬람교에게 학살당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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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렇다면 방글라데시 국민은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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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다음 편에서 계속될 이야기입니다.
놀라운 타이밍, 다음화를 기다려주세요.


감사해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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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속해서 좋은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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